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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적 체질...

황승현 | 2011.10.23 19:52 | 조회 3503


상처적 체질...

시인 류 근...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상처는 나의 힘“

언젠가 내적 치유 캠프에 다녀온 적이 있다...
종교단체에서 운영했던 내적 치유 프로그램은 함께 모인 사람들끼리 돌아가면서 자기가 일생 동안 받은 상처의 면면들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하는 내용이었다...

엄마에게, 아빠에게, 연인에게, 시어머니에게, 남편에게, 친구에게, 직장 상사에게 받은 학대와 유린과 상처의 히스토리는 참으로 깊고 다양하고 스펙터클했다...

감추지 않고 많이 털어놓을수록 치유의 효과도 크다는 말에 다들 어마어마한 생의 비밀들을 털어놓았다...
내적 치유의 클라이맥스는 자신이 미워하던 사람들에게 그를 용서한다는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었다...

가슴 저 깊은 벼랑 끝 어둠 속에 묻어두었던 상처를 빛 가운데로 꺼내 놓고,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편지를 쓰고 나자 놀랍게도 증오와 분노의 감정이 사그라졌다...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상처는 상대를 너무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실수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영화 「데미지」를 보면 아들의 연인과 사랑에 빠진 아버지가 나온다...
제레미 아이언스와 줄리엣 비노쉬...
그들은 위험 속에 격정과 스릴을 탐닉하지만, 그 장면을 아들에게 들키고, 아들은 상처와 충격속에 죽는다...

죄책감을 안고 생의 나락으로 추락한 아버지는 몇 년 후 자신과 아들이 동시에 사랑한 그 여자, 너무 특별해서 눈을 멀게 했던 그 여자가 결혼해서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풍경을 목격한다...
아직도 제레미 아이언스의 그 공허한 눈빛과 마지막 대사를 잊을 수 없다...

I am damaged

아! 어떻게 신은 이토록 부패하기 쉬운 재료로 인간을 만드신걸까?
상처를 준 가해자나 상처를 받은 피해자나 인생이라는 건 함께 뒤엉켜 곪은 채로 그 냄새를 참아가며 혹은 그 냄새를 피해 앞으로 도망가는 게 아닐까...

“인간을 믿지 마라... 인간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
대신 인간을 사랑해라“고 말하는 내적 치유 이후, 관계의 상처에서 나는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내가 상처로 이루어진, 상처투성이의, 언제든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상처적 체질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를 키운 8할이 상처라는 것도...
미소 짖지 않는 무뚝뚝한 인간에게 다치고, 피 흘리는 저녁 놀 때문에 다치고, 너무 활짝 핀 봄꽃 때문에, 바람 부는 날 포효하는 나무들 때문에 눈물을 쏟는다...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리하여 누군가 나에게 너무 예민하다고 염려하면
이렇게 대답하리라...
“음, 상처는 나의 힘이야”라고...

상처를 준 가해자나
상처를 받은 피해자나
인생이라는 건
함께 뒤엉겨 곪은 채로 그 냄새를 참아가며
혹은 그 냄새를 피해 앞으로 도망가는 게 아닐까...

김지수님의 에세이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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