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가 태어나려면...

황승현 | 2013.05.08 17:37 | 조회 2299


대전충남숲해설가협회 이전 개소식에서 받아온 '산림문학'지...
제30대 신원섭 산림청장님의 취임사도 있군요...

문학지 내용중 '시창작론'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글을 올립니다...




로메다님...
며칠 여행을 다녀오느라 답장이 늦어졌습니다...
아주 훌륭하게 숙제를 잘 하셨군요...
이미지를 찾아내는 솜씨가 아주 놀랍습니다...

「우산」에서 ‘외다리 박쥐’의 이미지를 찾았군요...
펼쳐진 우산은 박쥐의 날개처럼 보이지요...
하나의 손잡이를 ‘외다리’로 느낀 것도 그럴 듯합니다...

「항아리」에서는 ‘만삭의 곰’, 둥글게 부풀어 있는 항아리의 몸뚱이가 마치 임신부처럼 느껴지던가요?...
그것도 사람이 아닌 곰으로 말입니다...

「안경」으로부터는 ‘코에 걸린 자전거’라는 재미있는 이미지를 끌어냈군요...
네, 안경의 두 테가 마치 자전거의 두 바퀴처럼 생각되기도 하지요...

로메다님이 끌어낸 이미지들은 이채롭습니다...
좋은 시를 만들 수 있는 개성적인 이미지들입니다...
이제 시적인 이미지들을 잡아내는데 자신을 가질 만하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얘기한 이미지들은 어떤 대상과 유사한 특징을 지닌 다른 사물들이었습니다...
기다란 허리띠를 보자 뱀이 떠올랐다면, 두 사물이 지닌 유사한 특징은 ‘기다란’입니다...

이처럼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근거해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시론에서는 유추적(類推的) 이미지라고 부릅니다...

이런 유추적 이미지와는 달리 연상적(聯想的) 이미지가 있습니다...
꽃을 보자 벌이 생각나고, 벌을 생각하자 꿀이 떠올랐다면 이것이 곧 연상적 이미지입니다...

연상적 이미지는 두 사물의 인접성이나 친근성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시를 읽다보면 ‘바다’를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물고기’를 끌어들이고, ‘숲’을 말하면서 지저귀는 ‘새’를
등장시키기도 하지 않던가요?...

그런데 오늘의 현대시는 사물과 이미지 사이에 동일성이나 인접성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유추적 이미지나 연상적 이미지보다는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 내고자 합니다...

이러한 낮선 이미지를 상상적(想像的) 이미지 혹은 창조적(創造的) 이미지라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현대시를
난해하게 하는 요인의 하나입니다...

다음은 내 시론집 「엄살의 시학」(2000, 태학사)에 수록된 「시의 씨앗」이란 글입니다...
번거로움을 덜어드리고자 직접 인용합니다...
이미 설명한 앞부분보다 뒷부분의 창조적 이미지에 유념해 읽어주기 바랍니다...

한 편의 시가 태어나려면 우선 시가 될 수 있는 근거 곧 씨앗이 있어야 한다...
시의 씨앗을 동양에서는 시상(詩想)이라는 말로 표현해 왔고 서양에서는 이미지라는 용어로 즐겨
사용해 오고 있다...

시상 가운데 특출한 시상을 특히 영감(靈感)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치 인위적인 한계를 넘어선,
자연 발생적으로 주어진 천혜의 신비한 정신적 체험인 것처럼 여기고들 있다...

이러한 동양적인 견해와는 달리 서양인의 이미지 관은 보다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보인다(중략)...

주지하다시피 이미지는 대체로 유추(類推)와 연상(聯想)에 의해 형성된다...
달을 보자 머릿속에 둥근 쟁반이 떠올랐다면 이는 유추이고 꽃을 보자 벌이 생각났다면 이는 연상이다...
유추는 두 사물 사이의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근거하고 연상은 인접성이나 친근성에 근거한다...
따라서 유추적 이미지는 동일성이 클수록, 그리고 연상적 이미지는 인접성이 클수록 독자의 공감을
능률적으로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성이나 인접성에근거한 친근한 이미지들과는 달리, 아주 생소한 느낌을 주는 이미지들을
끌어내어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독자의 공감을 쉽게 불러 일으키는 보편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독자를 낮설게
만드는 개성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를 상상적 이미지라고 일컫는데 이것이야말로 창조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내용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개비처럼

김종삼 「북치는 소년」전문...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은 ‘내용없는 아름다움’ ‘크리스마스 카드’그리고 ‘진눈개비’등 세 개의 단순한
이미지들의 병치로 구성된 작품이다...
‘북치는 소년’에게서 앞의 세 이미지들을 동일성이나 인접성에 근거하여 설명하기란 곤란하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과거의 누구에게서도 제기되지 않았던, 비로소 김종삼에 의해 처음으로 들춰진
낯선 것들이다...
그래서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란 쉽지 않지만 우선 신선하고 신기하게 와 닿는다...
뿐만 아니라 유추적 이미지와 연상적 이미지는 동일성과 인접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대상과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의미망은 비교적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적 이미지인 경우는 대상과 이미지가 동일성이나 인접성으로 고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두 관계는 무한히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독자들은 자기들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인이 제시한 이미지에 끝없는 의미망을 구축할 수 있다...
소위 수용론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창조적 독서가 능률적으로 실현될 수 있게 된다...
현대시에서 상상적 이미지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 상상적 이미지는 대상이 시인에게 스스로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대상 속에 파고들어
발굴해 내야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광부가 하나의 광맥을 찾기 위해서 수백 미터의 지하를 뚫고 들어가듯이 창조적 이미지를 찾는다는 것은 예지와 인내와 노역을 동반하는 고행의 길이다...

그것은 사물과의 피나는 투쟁이며, 세계를 처단하는 폭력이며,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독재다...
시인이 그러한 고뇌를 감수하면서도 시인의 길을 가는 것은 바로 이 독재적인 창조를 통해 맛보는 환희로
보상받기 때문이리라...

시의 눈부신 씨앗-영감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 아니라 땀 흘려 찾는 자의 몫이다...

「엄살의 시학」

로메다님...
창조적 이미지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지요?...
네, 그러면 잠시 보류해 둡시다...
골치 아프면 밀쳐 두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기억해 두어야 할 중요한 것은 사물에 대한 깊은 생각입니다...
전에 거론한 바 있는 구양수의 삼다(三多)중 다상량(多商量)의 중요성입니다...
한 사물을 두고 계속해서 깊이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깨닭음의 어떤 경지에 이르게도 됩니다...

유학에서는 이를 격물(格物)이라는 어려운 말로 표현합니다...
쉽게 말해서 늘 생각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좋은 생각을 얻게 된다는 의미쯤으로 이해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이야기도 역시 골치 아프기는 마찬가진가요?...
그럼 이것도 그만 접어둡시다...
그것 아니라도 좋은 시를 쓸 수 없는 건 아니니까요...
잘 지내세요...
장마 뒤의 불볕더위가 괴롭습니다...

「산림문학지 17호」...
임호 선생님의 시창작론중에서...
-‘62년 서울대 국문과 졸업, 충북대 국문과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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